시니어 없는 회사에서 신입 개발자로 살아남기 (1)
시니어 없는 회사에서 신입 개발자로 살아남기 (1)
지난 7월부터 한 회사에서 프론트엔드 (React Native) 개발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특수한 시장 도메인과 지인 추천에 이끌려 좋은 조건으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합류하기 전부터 시니어가 존재하지 않는 회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수 없는 회사에 입사한 신입을 떠올리실텐데, 저는 그것보다 더 한 시니어 없는 회사에 합류했습니다. 단기간에 도메인 지식을 이해하고 그걸 iOS, Android 앱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우선 이해해야 하는 도메인 지식이 상상 이상입니다. 회사 업무 특성상 의료/제약 업계 전반을 다루는데, 병원과 제약사, 약국, 영업사원 모두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는 업계 군만 해도 5개 업계가 넘습니다. 제가 개발하고 있는 앱은 1000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앱이고요. 그 사람들의 생계가 달린 앱입니다. 이미 작게는 몇 백만 원에서 크게는 몇 십억 단위로 정산이 오고 가는 중이기도 하고요.
그런 특수한 도메인에서, 시니어 없이 이제 막 인하우스로 전환하는 회사에서, 1달 정도 근무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계속 깨지고 있는 중입니다. (…)
- 시니어 없는 회사라도
컨퍼런스 자료가 있습니다(!). 토스의 React Native 엔진 도입과 더불어 배민 앱, 다른 스타트업의 React Native 자료를 찾아서 점진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사실 크게 와닿는 점은 없었는데, 토스의 경우 번들링 최적화 중심으로 해설되었고 다른 발표 역시 추상적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큰 도움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일반적인 문제이고, 다른 스타트업도 해결했던 문제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나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니어는 없어도 시니어(?) 프리랜서는 계십니다. 다른 회사 일을 하면서 저희 회사 업무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사실상 시니어나 다름없습니다. 회사에 PHP 기능 대부분을 Java기반 API로 옮겨두셨고, 화면은 Vue로 대부분 대체하신 분인데, 이분 아니었으면 React Native 개발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분에게 모르는 API가 있을 때마다 질문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동안 그분 혼자 작업하셨기 때문에 기본적인 문서도 존재하지 않아서 인수인계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전 코드를 보며 리버스 엔지니어링하고 있습니다. 이럴때마다 보안을 공부한 게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내가 지금 CTF 문제를 푸는 건지 회사 업무를 하는 건지 모를 만큼 답답합니다. 진짜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이걸 왜 2달 안에 끝낸다고 해서 이 사달을 낸 건지. (더 큰 문제는 실제로 다 끝냈다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 디자인까지 더 다듬으라고 하시니 이제는 기능+디자인까지 고려해서 기간을 넉넉하게 잡아야겠다고 느낀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체계 없습니다. 시니어 없습니다. 문화? 없습니다. 복지는 당연히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어디든 빠르게 적응하는 생존력을 갖추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월급은 안 밀립니다. 돈 잘 버는 회사입니다.)
- 투자 받지 않는 회사
회사가 인하우스로 전환한 지 몇 달 되지 않았고 기술에 대한 투자를 꺼려하는 회사인데, 기본적으로 cost saving 산업이라는 한계가 작용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¹ 얼마 전 유명 VC의 투자를 거절하시기도 했고요. 이유는 지분 공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좀 큰 충격을 먹었는데, VC를 “고리대금업자”라고 표현하시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때까지 저는 투자는 받는 게 좋다는 입장이었는데,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투자를 받지 않고 성장하는게 사업의 정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삼성, 현대도 투자를 받지 않고 성장했으니까요.
아마 그래서 시니어 없는 회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대표님의 투자 받지 않는 마인드가 저의 미래일 수도 있고요. 저 또한 언젠가 창업가의 길을 가고자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그러다보니 기술 부채는 쌓여가고
보안을 공부했던 입장에서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격언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단 두 가지 기업이 존재한다. 해킹당한 회사와 당했는데도 모르는 회사”. 너무 충격이라 감히 말 못 하지만 회사 시스템이 상상 이상으로 취약합니다. (회사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외주를 주며, 페이지 단위로 개발을 진행하시다 보니 뒷단의 코드는 엉망입니다. 대표님도 아시는 눈치이긴 한데, 심각성을 전혀 모르십니다. 시니어겸 프리랜서 개발자분도 몇 번이고 보안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다는데 그때마다 “지금은 바쁘니까”만 하신다고 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바빠질 텐데 이 문제를 몇 번이고 미룬다면 회사 정말 몰락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합류하기 전 까지 기본 와이파이를 iptime에 비밀번호 없이 사용해두고 계셨으니 말 다했습니다. 그래서 시간 남을 때 비밀번호 설정해 드렸고 대표님께서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다며 좋아하셨습니다.
1 구체적인 사업에 대해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제약회사의 지출을 줄이는 사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