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Jun Huh

팰린드롬

20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다보면 종종 “엌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벌써 22살이야!”라고 이야기한다. 절대적으로는 젊지만 상대적으로는 체감되는 나이다. 물론 아직 20대 초반이고 조금은 더 과감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느낀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계하는 냉소적인 마인드를 20대부터 습관화하기는 싫다.

세상에는 으레 존재하는 불문율들이 있다. 어렸을 때는 그러한 불문율을 골라 하나 둘 깨뜨려봤다. 잘 돌아가는 사회의 시스템을 방해하고 타인의 귀찮음에서 시작된 취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누군가에겐 해킹, 누군가에겐 폭력, 누군가에겐 징계. 천진난만한 나를 구제해 준 건 다름아닌 시스템 속 호의였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내가 받은 호의를 돌려주겠다고 막연히 약속했다. 

고등학생 이후로는 줄곧 소프트웨어만 집중했다. 좋은 제품은 무엇인지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꽤 많은 제품들을 만들어보며 창작의 기쁨을 누렸다. 가끔은 WebXR 기술을 사용한 VR 게임을 만들어보기도, WASM을 사용해서 FFT를 직접 구현해보기도. 그때 만든 GitHub 조직에 수록된 41개의 공개 레포지토리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 꽤 열심히 살았었다고 나 자신을 칭찬해본다. 하지만 돌아보니 의미가 없었고, 과거에 무언갈 해놓고 왜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과거를 칭찬하는 건 배움없는 아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해야만 하는 일들에 산만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허준이 교수의 졸업식 축사1처럼 생애에서 으레 해야만 하는 불문율들을 지키는 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 

2023년에 쓴 “내가 고등학생 개발자라고 밝히지 않는 5가지 이유”2를 다시 읽어봤다. 

지금 내가 고등학생 신분에 만족한다면,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불만족하며 살아갈 날이 많을텐데. 그때마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좀 다르게 읽힌다. 미래의 나에게 전하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는 미래를 두려워해서, 미래에는 과거에 안주해서 불행해진다. 잠시 이 모든 것들이 환영이라고 생각해보고 내려놓아보자. 해야만 하는 일들이란 무엇을 선택하냐에 달려있다. 인생을 가르는 주요한 선택을 외주 맡기는 일만큼 불행한 삶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매 순간 절박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복리효과는 매 순간 좋은 선택이 모여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지 못했다.

얼마 전 적은 성공의 정의 마지막에 “천천히 쌓인 복리와 신뢰는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된다.”라고 적었다. 좋은 제품의 디테일한 요소. 하루하루 쌓이는 좋은 결과들이 복리를 만들고, 만들어진 복리는 또 다른 영역에서의 복리를 창출한다. 이 모든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선택의 폭을 넓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택으로 친절함을 미래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운이 좋아 크게 성공한다면 펀드를 만들어 창업가들에게 낮은 대가로 투자를 하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친구들과 그리고 가족들과 맥주 한 잔 마시며 평안한 노후를 보낸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상적인 불문율에만 집중하기엔 현실이 너무 아름답다.

니체는 삶의 고통과 허무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껴안으며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갈 것을 권유했다. 과거의 질문이 현재에 답하고 현재의 질문에 과거가 답하는, 시간의 축을 넘어선 복리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인이자 살아가는 이유다. 그렇게 비로소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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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독자분들께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식을 만족하는 건 어렵고 흐름을 맞추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니까요.

팰린드롬 구조입니다.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똑같이 읽히는 단어를 의미하지요. 중간에 적힌 인용문을 기준으로 첫 6문단은 미성숙한 질문을, 그에 대응되는 답변 구조입니다. 

언어란 무엇인가 질문합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신경망에 필적하는 맥락을 전달 가능하겠지만 결국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비효율적일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시간의 비는 상한이 있는 포화곡선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답합니다. 에이와의 존재는 각 개체의 신경망을 연결하여 초공감을 이끌어낸다고. 상대방이 내가 되고 내가 상대방이 되는 종교적 경험이라 시사합니다. 인류는 언어와 지식을 문법으로 포장하여 전달합니다. 그 과정에서 맥락의 손실이 일어나고 오해와 불신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AI 에이전트가 언어의 간극을 해결해줄 수 있다 믿습니다. 내 고유한 경험, 인식,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는 에이전트가 있다면 상대방 에이전트가 이를 전달하여 공감을 대신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AI 에이전트의 시대는 BCI의 등장으로 흡수되고 휴머노이드 - 인간의 연결이나 인간 - 인간의 연결도 가능해질 거라 봅니다. 말하는 상대방의 관점이 그대로 ‘떠오르는’ 굉장히 미묘한 경험일거라 상상해봅니다.

어떤 불문율을 깨뜨렸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엇나가본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본인의 경험을 대입해서 읽어보세요. 시스템 속 호의가 무엇이었는지도 마찬가지로 적지 않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해야만 하는 불문율이란 허준이 교수가 축사에서 말한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를 뜻합니다. 처음 읽으셨다면 아마 이 글이 전체적으로 퀀텀점프 되어있다고 느끼실거라 생각합니다. 맥락은 의도적으로 빠져있고 여러번 읽기 위해 쓰인 글이니까요. 구조를 능동적으로 해석해서 도출되는 결론이 이 글의 진짜 결론입니다.

2번째 문단을 쓸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미친놈처럼 보이기 싫었거든요. 돌고래유괴단 신우석 감독이 인터뷰에서 “면접 보러 오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미친놈처럼 보이고 싶은 정상인과 정상인처럼 보이고 싶은 미친놈’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정상인처럼 보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저 문단이 있어야 글이 완성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정상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불문율이 있으니까요. 이 글은 그런 불문율을 알고는 있되, 거기에 맞춰서 살지는 말자가 핵심인데 정작 저자가 그런 불문율들에 신경 쓰고 있다면 글 읽는 맛이 안 나겠죠. 글과 행동이 어긋나는 모순을 만들기 꺼려졌습니다.

Footnote

  1. https://www.youtube.com/watch?v=OLDhaqosPtA ↩

  2. https://cse.ac/jun/5-reasons-why-i-dont-reveal-im-a-high-school-developer/ ↩